3/11/2008

편 가르기로 단정짓는 것은 구술 문화의 전통

편가르기와 언어 활동을 연결짓고 있는 재미있는 글이 있어 아래 장소에서 퍼 왔습니다. 그리고 이 글과 관련한 생각을 좀 적어 보았습니다.

“인터넷 문화, 차가운 냉소와 합리적인 논쟁이 필요하다”
“요즘 보수 신문들은 ‘편가르기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에 대해 진보 진영에서는 편가르기를 먼저 시작한 것은 반대편에게 용공이니 빨갱이니 좌파니 하는 딱지를 붙였던 기득권 세력 아니냐고 반문을 하고 있고요. 정치권이나 시민사회에서도 우리 사회가 진보로 가느냐 보수로 회귀하느냐의 논쟁을 멈추지 않고 있는 듯 한데요. 어떻게 보십니까. 이 시점에서 진보와 수구의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시는지요.”

기자의 질문에 그는 “논리로 따지지 않고 무조건 편가르기에 급급한 것은 구술문화의 영향”이라고 잘라 말한다. 사실 ‘두 걸음 앞선 진보’를 지향하면서 진보 진영 내부에도 아픈 비판을 주저하지 않았던 그이기에 ‘이 쪽이냐 저 쪽 이냐 태도를 분명히 하라’는 시비에 여러 차례 시달려왔던 전력이 있기도 하다.

“우리 나라는 문자 문화가 시작된지 사실상 50년 정도밖에 안됐어요. 사람들이 아직도 논리적이지가 않아요. 감성적이고 정서적이죠. 논리적으로 따지기 보다는 어느 편인지로 구분하는게 훨씬 빠르고 쉽거든요. 인터넷 자체도 구술 문화적이에요. 인터넷 글은 사실 말에 가깝지 글이 아닌거죠. 인터넷 시대를 맞아 구술 문화가 활자문화인 것처럼 보이는 거에요. 저는 이 현상을 ‘2차 구술문화’로 봅니다. 차가운 냉소와 합리적인 논쟁, 이걸 바탕에 깔아야 인터넷 문화가 제대로 될 거에요.”
- 출처: 미디어 다음 - 진중권 인터뷰 중에서 2005.6.17(금) 17:30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정신 활동 중 하나를 범주화(categorization)라고 봅니다. 이는 끊임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수많은 정보들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하나의 정신작용(mental mechanism)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머릿속에 어떤 틀을 갖추어 놓고 그 틀에 맞추어 들어오는 정보들을 효율적으로 분류해 내는 것입니다. 스키마 이론 역시 이러한 인간의 정신작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인간은 사물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사람에 대해서도 이러한 정신작용을 일으키는데 인간이 타인을 범주화하는 것과 깊이 관련되는 개념이 고정관념화(stereotyping)이고, 스스로를 범주화시키는 것과 관련되는 것이 자기정체성(identity)입니다. Abrams(1992)와 같은 심리학자는 인간이 이러한 정신 활동을 일으키는 근본적인 원인이 부, 권력, 지배에 대한 욕망에 있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편가르기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정신 활동 중 하나이며 구술문화의 유산만은 아닙니다. 인쇄문화가 수백년이 된 서구의 신문 매체는 편가르기에서 얼마나 자유롭습니까? 한국의 신문 매체는 편이 너무 훤히 드러나보여 굳이 말을 할 필요가 없을 지경입니다. Roz Ivanic(1998)의 Writing and identity와 같은 책은 인간의 문자문화 활동 역시 자기정체성 작동(identity activation)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인쇄 문화에서 이런 편가르기는 구술문화에서와는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어 왔을 뿐입니다. 좀더 교묘하고 치밀해졌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걸 "차가운", "합리적"인 방식이라고 하지만 Walter Ong은 구술문화의 사고 방식이 인쇄 문화의 사고 방식에 비해 후진 것(비논리적)이었다는 비판에 대해 별로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구술문화에서의 의사소통 방식과 인쇄문화에서의 의사소통 방식은 그 문화 자체가 다르듯 논리를 전개하는 방식 또한 다를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터넷 문화가 인쇄문화를 따라가야 한다는 것은 그다지 동의하기 힘든 주장입니다.

Abrams, D. (1992). Processes of social identification. In G. Breakwell (Ed.), Social psychology of identity and the self-concept (pp. 57-99). London: Academic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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