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2008

[퍼온 글]‘놀자 수업’으론 미래없다

[기고] ‘놀자 수업’으론 미래없다 ..... 황용길 (2001.09.18 - 조선일보)

한국의 전설과 고담에는 신선들이 모여사는 비밀의 마을이 자주 등장한다. 사슴과 학을 벗해 이슬을 마시고 사는 사람들 이야기다. 미국인들에게도 이런 가상의 마을이 있으니 이름하여 워비곤 호수(Lake Wobegon)다. 신비스럽게도 워비곤 호숫가에 사는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다 잘 생겼고 똑똑하며 모든 가정의 살림형편도 한결같다. 그러니 싸울 일도 없고 만사가 그지없이 편하고 좋다. 온 동네 사람들이 모두 잘났고 빈부의 차이가 없으니 질투하고 시기할 이유가 도대체 없기 때문이다.

미국의 교육학자들은 이야기 속의 워비곤을 지상에 실현키로 작정을 했다. 모든 공립학교를 워비곤 마을처럼 만들면 결국에는 전체사회가 워비곤으로 변한다는 진보주의 교육이념이다. 1930년대의 아동중심 교육, 60~70년대의 열린 교육, 90년대의 학생중심 교육 등이 추진되면서 교과서는 얇아지고 숙제는 줄어들었다. 또한 학과지식의 전수와 축적은 주입식 교육으로 매도되어 밀려났고, 시험은 쉬워지거나 없어졌으며 성적표가 사라졌다. 공립교육에서 경쟁과 비교의 개념을 축출해 우수함과 부족함의 차이나 특출함과 모자람의 차이를 인위적으로 없애려는 평등주의 사고의 실천이었다.

그 결과는 하향평준화와 빈부격차의 심화다. 줄세우기 못한다고 일등과 꼴찌의 구분을 없애자 공립학교 아이들의 학력은 빠르게 추락했다. 학습에 대한 욕구와 동기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강요된 평등이 초래한 학력의 전체적인 침몰현상으로 구소련의 협동농장이 제풀에 주저앉은 이유와 상통한다. 문제는 거기서 출발했다. 공교육이 무너진 폐허 위에서 그나마 부유층은 사립학교, 사교육, 외국유학 등의 탈출구를 찾아 충실히 자식교육을 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서민과 가난한 가정의 아이들은 속수무책 대안이 없었다. 결국 부자들에게만 고급교육의 기회가 허용된 셈이다. 교육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다.

이토록 엉망인 미국 공교육을 흉내내며 한국교육은 무너졌다. 변화를 갈구하는 대중의 요구를 인기에 영합하는 값싼 포퓰리즘으로 오도하며 온갖 이익집단의 비위맞추기에 급급한 정부와 교육당국의 단견과 무능력 탓이다. 학교붕괴라 불리는 한국의 교육문제는 교육의 IMF다. 변별능력이 없도록 쉬워진 수능시험, 전교생의 절반이 만점을 받는다는 부풀려진 내신, 노래 잘하고 춤 잘추는 연예인들에게만 유리한 특별전형 등을 어떻게 내일을 보며 준비된 장기적인 교육정책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백년 가까이 「죽을 쑤어온」 미국의 공립학교는 이제 늦게나마 정신을 차리며 빠르게 변신하고 있다. 전통적 지식중심교육으로의 회귀를 꾀하며 숙제와 학습량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초·중·고에서의 시험기준이 강화되어 연례 진급시험에 실패하면 여지없이 낙제생 신세며 성적이 불량한 학교는 폐교처분까지 불사하겠다는 정부의 초강경책이 학부모들의 환영을 받는다.

미국은 공립학교가 무너져도 사립학교 출신과 해외에서 수입한 우수한 두뇌로 학문과 산업을 지탱한다. 광활한 국토와 풍부한 자원, 그리고 세계경제의 20%를 차지하는 막강한 경제력 덕분이다. 우리는 어떤가? 오로지 인력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있는 두뇌도 밖으로 내모는 형편이며, 한국으로 이민오겠다는 외국과학자는 찾을 수가 없다. 공사립의 구분이 없는 한국교육의 입장에서 한쪽이 무너지면 막을 대책이 없다. 따라서 공교육의 회생은 절체절명의 과제다.

교육에 있어서 우수함(excellence)과 형평성(equity)은 상치하는 개념이다. 어차피 한쪽은 놓칠 수밖에 없는 까닭에 동시에 둘을 다 잡겠다는 허황된 꿈을 버려야 한다. 그렇다면 어느 쪽을 택해야 할까? 한국 교육은 단연코 우수함을 좇아야 한다. 인력 외에는 아무런 자원이 없는 우리의 입장에서 미국의 워비곤 호수는 그야말로 달콤한 꿈이다.

( 미 루이지애나 주립대(쉬리포드 소재) 교수·교육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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